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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돼지( Porco Rosso, 1992. 일본 )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출연:   Tokiko Kato, Akio Otsuka, Akemi Okamura, Shuichiro Moriyama

내가 사랑한 하늘, 바람, 비행



"날지 못하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A pig who does not fly is just an ordinary pig." - 마르코


어렸을 때 한 번쯤 하늘에 대한 동경을 품지 않은 사내 아이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 당신은 장손자인 나를 무척이나 아끼셨다. 물론 당신의 첫 손녀인 나보다 세 살 위의 누이도 무척이나 예뻐하셨다고는 하는데, 옛날 노인네들이 다 그러했듯이 당신도 손자인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당신의 무릎동이로 애지중지하며 귀여워하셨다고 한다. 그런 손자였으니 자수성가하신 분답게 자식들에게는 아끼던 것도 손자인 나에게만은 아끼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 만큼은 물질적인 씀씀이에서 그다지 아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홉 살 때까지는 말이다. 5-6살 무렵의 나는 할아버지가 눈깔사탕 사먹으라고 주시는 돈으로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판매하는 54:1 정도의 축소 프라모델 비행기 만드는 것을 꽤나 즐겼다.

이때 유행하던 TV만화가 <유성소년 피터>, <바다소년 마린보이>, <서부소년 차돌이>, <달려라 마하 고고> 같은 소년 모험 만화였는데 당신은 손자가 그런 노래들을 따라 부르며 재롱부리는 것을 즐기셨다.(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는 왜 아이들 보는 만화영화에 하나같이 무슨무슨 소년이란 제목을 붙였던 것인지.) 그리고 기특하게도 손자 녀석이 군것질하라고 내준 푼돈을 아껴 작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뚝딱뚝딱 비행기 모형을 만드는 것을 무척 예뻐해주신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즐겨 만든 비행기는 P-51D 무스탕(요새는 '머스탱'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저 입에 밴 대로 무스탕이 좋다)이었다. 그리고 나의 추억에 아로 새겨진 또 하나의 비행기가 F-4 팬텀이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선물했던 유일한 장난감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끔 비행기 프라모델을 사서 조립하는 취미를 버리지 못한 것은 비행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비행기를 조립하는 동안 나의 추억을 짜맞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당신들 모두 이곳이 아니라 저 하늘의 바람 속 어딘가에 계시므로….





좋은 녀석은 언제나 죽어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행(飛行)의 이미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가 만든 거의 모든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은 한 번 이상은 하늘을 난다. <미래소년 코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의 토토로>,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의 택급편> 그리고 <붉은 돼지>에 이르기까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늘에 대한 동경을 숨기지 않는다. 이런 비행과 하늘에 대한 판타지는 그대로 애니메이션을 통해 구현된다. 그의 애니메이션에 구현되는 창공의 이미지는 중력의 한계 정도는 가뿐하게 벗어난다(굳이 그의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하늘은 꿈과 희망의 공간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각박한 현실의 무게를 털고 그가 만들어 논 세계 -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결코 거부감이 들지 않는 세계 - 에서 즐겁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붉은 돼지> 이전까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개 어린 소년, 소녀들이었다. 그는 중년이 된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정말 자신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붉은 돼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잡지에 연재하던 자신의 '비행정 시대'라는 글에 기초하여 40분 짜리 중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일본항공(JAL)의 기내 상영물을 만들려던 그의 처음 기획은 몇 단계를 거쳐 발전하면서 중년이 된 자신을 위한 꿈을 담은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확장되었다. 그래서인지 <붉은 돼지>에는 그가 즐겨 내세우던 소녀 히로인의 이미지를 지닌 주인공이 나오지 않는다. 밀라노에서 그의 비행기 'Porco Rosso'를 제작해준 천재적인 항공 엔지니어 '피오'가(극중 17세) 있긴 하지만 전작들과 비교하자면 매우 평범하다. <붉은 돼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인 '마르코'와 '지나'는 청춘의 곡절을 지나 인생의 중년을 맞이한 녹록치 않은 인물들로 그려진다. 이것은 중년이 된 감독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미야자키는 "인간은 중년이 지나면 돼지가 된다"고 말했다는데 다소 냉소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종종 작품 속에서 인간 세상에 대한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펼쳐보이는 것에 비추어보자면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의 2001년 작품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로 변한 것도 그의 말에 비추어보면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의 일이라 할 수 있다. <붉은 돼지>에서 마르코는 마법에 걸렸다기 보다는 스스로와 인간 세상에 대한 혐오로 인해 저주를 걸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이었지만 그 전쟁에서 절친한 친구이자 지나의 남편인 베를루니를 잃고 만다. 영화 중반의 회상신에서 마르코가 어째서 스스로를 돼지로 만들어 버렸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힌트랄 수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는 3대의 적기(독일군)와 공중전을 벌이는 와중에 친구인 베를루니가 격추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자신과 기체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무의식 중에 하늘의 무덤(마치 옛날 바닷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배들의 무덤 사르갓소를 떠올릴 수 있는)을 발견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그는 친구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좋은 녀석은 언제나  죽어…" 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앞세운 사람에 대한 회한과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그를 돼지로 만들었다.



구체적인 역사 현장과 묵직한 주제 의식





" 포르코, 왜 돼지가 됐죠? "
………
" 포르코, 키스해 볼까요. "
" 개구리가 된 왕자님이 공주의 키스로 인간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
" 바보, 그건 동화일 뿐이야. "
...
" 나는 안될까? "
" 너는 착한 아이야. 피오를 보면  인간도 버려서는 안되는 거라 생각해. "



사실 그의 이전 작품들과 <붉은 돼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우선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이듯 모호한 시대 배경과 지리적 장소가 아닌 구체적인 시간대와 장소가 명시되고 있다. 장소는 이탈리아의 근해인 아드리아해, 밀라노의 비행기 공장, 제1차 세계대전 후이며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고 이제 막 전쟁의 불기운이 커져 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이런 구체성을 부여하게 만든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자신이 중년에 접어든 자신을 위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점에서 동기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한 시기의 역사를 빼놓고는 이 작품을 설명할 수 없다. 미야자키에 대해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 중 하나는 그가 소위 '심정적 좌파'라는 것이고, 실제로도 젊었을 때 그와 관련된 활동들을 했다고 한다(그런 방면으로 알려지긴 미야자키 하야오가 더 많이 알려졌지만 다카하다 이사오가 그런 방면으로는 소리없이 더 많은 활동을 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붉은 돼지>를 구상할 당시만 하더라도 유고슬라비아를 배경으로 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는데, 당시 유고 내전이 발발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 배경을 이탈리아로 바꿨다고 한다.

지난 1991년 12월 11일엔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티토의 사망 이후 곧이어 유고연방에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이탈과 독립을 선언하고, 이들 두 나라의 독립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판단한 유럽공동체는 곧바로 독립을 승인했다. 그리고 유고연방군이 이들 두 나라의 이탈을 막기 위해 침공을 벌이면서 유고 내전의 불씨가 당겨진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에 이르는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의 친나치계 민족주의 세력인 우스티시에 의해 세르비아계 주민 5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과 같이 오랜 원한과 맞물리면서 인종 청소 양상으로까지 비화되고 만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인간의 악마적인 잔혹함과 극단적인 폭력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폭력과 갈등이 아닌 화해와 이상이라는 창공에 풀어놓고자 했다. 그에게 하늘은 제압해야할 상대도, 폭력의 공간도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하늘에 떠 있는 무력이 늘 패배하는 까닭은 그의 신성한 공간을 더럽히는 대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같은 동료인 다카하다 이사오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의 작품 <반딧불이의 무덤>에서 하늘은 공포와 종말의 대재앙이 다가오는 검고 어두운 하늘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명파일럿 마르코는 현란한 공중기술과 뛰어난 조종능력을 발휘함에도 전투 중 적의 기체만을 격추할 뿐 상대방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도 명성이 높았다고 표현된다. 이는 실제 제1차 세계대전의 명파일럿들이 지녔던 미덕이기도 했고,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에이스 '아돌프 갈란트' 등에게 계승되기도 했다. 이런 대목은 또 하나의 항공 애니메이션 <에어리어88>에서도 부각된다. <붉은 돼지>에서 "끝없이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마음을 깨끗이 닦아주기 때문에 파일럿은 모두 투명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누구보다 높은 명예와 긍지를 지녔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마르코의 마음이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음일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은, 인간은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것이라는 중년에 접어든 넉넉함에서 배어나오는 말을 우리에게 건넨다. 학살과 폭력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속에서도 그래도 인간을 버릴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 탓인지 돼지 포르코는 마지막에 인간의 얼굴로 돌아온다.(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인가? 흐.)





아드리아해의 풍광 속에 젖어든 붉은 돼지




돼지가 된 '마르코 파곳(Marco Pagot)' 대위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탈리아 공군의 에이스 파일럿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겪으며 인간임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려 돼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택한 생활 공간은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아드리아해였다. 그는 이곳에서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자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부인이었던 지나의 호텔 '아드리아노'에 가끔씩 들러 그녀의 안부를 묻고 술 한 잔을 마신 뒤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돌아간다. 한때 인간이었던 시절 그의 얼굴이 남아 있는 사진에는 스스로가 덧칠을 해둔 채 지나의 레스토랑에 걸려 있는 것이 유일하다. 그는 지나를 사랑했으나 공군 장교로서 적국의 여자와 결혼할 수 없어 결혼을 미뤘고, 지나를 사랑한 다른 친구 베를루니가 그녀와 결혼하고 만다. 그는 젊은 시절 군인으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개인으로서의 사랑 사이에서 국가와 애국심을 택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전쟁은 그의 정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아드리아해의 자유로운 비행정 파일럿으로 그 일대를 배경으로 활동하는 무법자 맘마 유토단이라는 공적(空敵; 이들의 이미지는 마치 <천공의 성 라퓨타>에 등장하는 '도라 일당'과 흡사하다.)으로부터 운송로를 지켜주고 그 대가를 받아 살아간다. 그의 비행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것이었음에도 절대로 인명을 살상하지 않는 그만의 원칙을 지켜간다. 호텔 아드리아노의 사장 '지나'는 맘마 유토단을 비롯해 만인의 연인이자 흠모의 대상이었는데 오직 그, '포르코'만이 그녀에게 냉정하다. 그것은 그녀를 선택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회의이자, 전쟁의 와중에서 산화해간 적과 아군의 구분없는 인명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그에게 조국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그의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것이다(그런 점에서는 영화 <지중해>와 흡사한데 두 편의 영화가 모두 1992년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도 묘한 일치를 보인다). 그의 애기 포르코 롯소가 맘마 유토단의 공격에 크게 손상을 입어 밀라노의 비행기 공장에 가서 수리를 받게 된다. 이 장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가 작품 전체를 통틀어 보이는 특유의 세계관, 여성관을 되풀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장의 기능장이라고 할 수 있는 노인을 제외하고는 전부 여성들로 이루어진 곳으로 그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의 가치있는 본성을 여성성(페미니떼)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붉은 돼지>는 이전까지는 메인 테마라기 보다는 부수적인 상징으로 다뤄지던 하늘과 비행의 이미지가 메인 테마로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그의 본격적인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에어리어88>과 같은 애니메이션이나 마츠모토 레이지, 카와지리 요시아키 등에서도 비행 장면은 매우 정교하고 짜임새 있는 연출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마츠모토 레이지의 하늘은 하늘 그 자체라기 보다는 바다의 확장된 이미지이고, <에어리어88>이나 다른 애니메이션에서 사용된 하늘의 이미지나 비행 역시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창출했다기 보다는 부수적인 이미지라는 느낌이 강한데 <붉은 돼지>는 그 자체가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메인 테마라는 점에서 다른 애니메이션들과는 현격하게 구분될 수 있다. <붉은 돼지>에서 특히 인상적인 비행씬은 밀라노에서 파시스트 이탈리아군의 추격을 피해 아드리아해로 접어든 '포르코'가 자신의 애기를 호텔 아드리아노 인근에서 펼치는, 어쩌면 잊을 수 없는 옛 연인 지나를 위한 '사랑의 세레나데'라고도 할 수 있는 비행장면과 미국에서 고속비행대회를 석권하고 찾아온 비행사 커티스와의 대결 장면일 것이다.




윗그림은 <붉은 돼지> 마르코의 애기. 포르코 롯소(Porco Rosso)이고, 밑의 그림은 이탈로 발보의 애기 사보이아 마체티(Savoia-Marchetti) SM.55X이다. 물론 발보의 비행기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대형이긴 했지만 기체의 모양이나 실루엣은 상당히 흡사하지 않은가?


인간을 버릴 수 없어 다시 인간이 된 포르코


돼지인 포르코를 사랑하는 지나와 돼지(이것은 그의 '트라우마'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한데)로 머물고 있기 때문에 지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포르코. 그리고 그 사이에 새롭게 등장한 두 명의 인물, 피오와 커티스는 포르코에게 어떤 의미에서건 선택을 강요한다. 그러나 그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상처받고, 인간으로 위로받는다'는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에게 절망하면서도 역시 인간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포르코는 배우게 된다.  비록 돼지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돼지 포르코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감동을 준다. 왜냐하면 그는 비행하는 돼지이며, 그의 비행에는 인간에 대한 우정과 사랑, 자유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커티스는 포르코에게 피오를 걸고 내기를 걸어오고, 이를 거부하려 했지만 피오가 당돌하게도 그 내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포르코는 커티스와 공중 승부를 겨루게 되었다.

하늘에서의 승부는 막상막하였고, 두 사람은 결국 지상으로 내려와 승부를 마감짓게 된다. 두 사람의 결투는 승패나 증오,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와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모든 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확인하는 한 판의 멋들어진 축제로 승화된다.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사람인지 돼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두 사람. 결국 승리는 포르코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말많은 엔딩 장면이 이어진다. 포르코가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말이다.  단지 마지막에 이르러 비행기 수리비를 받은 피오가 다시 고향 밀라노로 돌아가기 위해 포르코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고 돌아섰을 때, 커티스는 포르코를 보며 "이봐. 포르코! 얼굴 좀 보자. 자네 얼굴이, 얼굴이..." 하는 대사가 흐를 뿐. 끝까지 포르코인지, 마르코인지 그의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피오가 포르코의 비밀 기지에서 했던 개구리왕자의 우화대로 피오의 키스로 포르코가 다시 마르코로 돌아왔을 수도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것을 그저 관객들의 몫으로 돌린다. 물론 해피엔딩을 사랑하는 나는 포르코가 사람의 얼굴을 한 마르코로 돌아왔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는 사실 또한 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명확히 아는 것보다는 오히려 불명확하게 아는 편이 훨씬 행복할 것이다.

그가 다시 인간이 되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비참하고 비극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뒤 이번엔 과연 무엇이 되었을지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돼지만도 못한 인간들의 국가이성(國家理性)과 국익(國益)


간혹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나오는 '단독강화'의 메시지는 나를 무척이나 매혹시킨다. 나의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전쟁의 광기와 정면에서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과연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이토록 강성한 나라에서 개인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집총 거부는 국법에 의거 다스려지는 사회가 우리나라 아닌가?  인간을 거부한 돼지, 포르코에게서 자유를 느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억압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국가 이성(reason of state)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때로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잔혹한 대접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가란 시스템은 '국가이성'이란 명목 아래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는 권력이 법·도덕·종교보다도 우위에 서야 한다는 것(규범의 수단화), 국가이성은 권력 자체에 높은 목적 합리성을 인정한다는 것(고도의 목적합리성), 국가는 그 존재 이유를 국가 자체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국가의 자기목적성) 등으로 표현된다.

국가이성은 때로 공공복지와 결부되어 자국의 복지 증진을 위해서는 타국 인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장악하여 자국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제국주의의 논리로, 국가의 생존은 '안보'의 논리로 귀결되어 안보란 미명 아래 모든 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이자 권위가 되었다. 이는 또다시 확장되어 자국의 존립을 위해서는 국제 사회의 규약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독일 제3제국은 그들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 확보라는 명분 아래 자국에서는 유태인과 집시 학살로, 소련과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대대적인 슬라브 인종 청소로 나아갔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국가이성의 작동을 본다. 2003년 미국은 '9.11테러 사건' 이후 세계는 변했다는 말로 그들의 '절대안보(Absolute Security)'와 명백한 침략전쟁으로서의 예방전쟁(preventive war)인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국익이란 이름으로 이것을 합리화했다.

국가이성은 현대 사회에 와서는 규범의 수단화를 위해 다양한 상징조작과 매스커뮤니케이션에 의한 대중조작, 선전이나 홍보에 의한 여론조작을 실시하고, 외교면으로는 레토릭에 불과한 외교적 언사와 국가이익을 최우선에 둔 마키아벨리적인 권모술수로 나타난다. 국가는 직업공무원제에 바탕을 둔 관료제와 국민주권론에 입각한 국민 정치 참여제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단지 선거 시즌만의 공허한 구호로 전락하고 선거가 끝나면 역시 자신이 선출한 권위주의 체제에 복종해서 살아가는 '자동인형(주체적 판단 없이 유행이나 광고에 따라 수동적으로 소비 생활을 하는 대중들의 삶을 비유한 말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으로 전락하고 만다. 참신한 개혁과 권위주의 청산을 주창하던 대표적인 자유주의자 유시민에게서 내가 실망을 느낀 것은 그가 우리나라의 이라크 파병을 옹호하면서 국가는 자기목적성이라는 '국가의 신성한 이기주의(sacro-egoism)'를 긍정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그 개혁의 도덕적 명분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돼지 포르코의 한 마디가 떠오른다.
"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가 낫다. I'd rather be a pig than a fascist "  



Posted by 그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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